2009년 2월 4일 수요일 저녁 9시 30분
많은 이야기, 사건, 인물들로 부귀를 누린 어제는 어느덧 꼬리를 감추고, 지끈한 두통이 노곤한 자장가를 조용히 반복해 부르는 가난한 오늘이 얼굴을 들이민다. 오르막과 내리막의 연속.
어제 만난 얼굴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본다. 빨간 코트에 미색의 털 모자를 쓴 키 작은 할머니가 카페에 앉아 작게 여러 번 접은 신문을 읽으며 차를 마신다. 나는 책을 읽는 벤의 어깨 너머로 할머니를 관찰한다. 털 모자 아래로 늘어진 하얗게 쉰 할머니의 짧은 다발 머리. 길쭉하게 하나만 기른 왼손 엄지 손톱. 아담한 체구에 비율이 맞지 않는 커다란 사이즈의 고동색 부츠.
한 사내가 카페로 들어 오더니 할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차를 주문하러 카운터로 걸어간다. 일회용 컵에 음료를 받은 사내가 할머니를 마주하고 앉는다. 일흔의 나이를 족히 넘겼을 것 같은 백인 할머니와 삼십대 후반 깨로 보이는 라틴계의 사내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마냥 대화를 나눈다. 둘이 함께 앉은 모습이 어쩐지 코믹하다. 나는 ‘헨리와 준’을 읽는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할머니는 자기가 못마땅해 하는 한 여자 이야기를 꺼낸다. 할머니는 사내에게 왜 그녀를 자신의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지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 한다. 한참 넋두리를 늘어놓던 할머니는 차를 마시려 잠시 말을 끊는다. 잔을 내려놓고는 그녀가 말한다.
“You know how hard it is for me to find a true friend? A friend that I can lean on, you know.”
사내가 동정 어리게 고개를 끄덕인다. 할머니는 잠시 말이 없다.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사람이란 나이를 불문하고 하나 다를 것이 없구나. 할머니, 일흔의 나이에 진정한 친구를 찾기 힘들다며 푸념하시고, 나이 서른의 나도 똑같은 고민으로 마음이 외로우니…’ 나는 할머니에게 묘한 연민의 정을 느낀다. 할머니는 사내에게 댄스 파티에 갔던 이야기, 친척들이 다른 도시로 이사간 이야기, 영화를 보러갔던 이야기를 차례로 들려준다. 사내는 차를 마시며 잠자코 듣는다.
“You know how much it was to go to the movies when I was young? A nickel. You know whom I went to the movies with? A bunch of cowboys. I went several times with them. Then they bored me, so I didn’t go anymore.”
할머니의 말에 사내가 조용히 웃는다. 나도 웃는다.
“A nickel it was. On Monday, you can watch a movie with five bucks at the square.”
할머니가 성의껏 덧붙여 말한다. 나는 책을 읽는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다. 나는 순간 고민에 빠진다. 아나이스의 이야기를 들을 것인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을 것인가. 행복한 고민…
션이 출전하는 스트릿 하키 경기를 관전하러 밤 열시가 넘은 시각에 차를 몰고 남버팔로로 향했다. 아레나는 예상 외로 설비가 잘 갖춰진 편이었다. 나는 자판기 쿼터 세 개를 주입하고 C0를 눌러 작은 프렛쯜 한 봉지를 샀다. 션은 선수 벤치로, 우리는 관중석으로 향했다. 앞 경기가 연장전까지 가는 바람에 션의 경기가 스케쥴보다 삼십분 늦게 시작했다. 우리는 스탠드 가장 윗 자리에 앉아 경기를 본다.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덴 커민스키의 열변을 듣는다. 그는 결혼 정령기를 맞은 그가 단짝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가 미혼 여성에게 유리하게 적용되는 60년대의 개정된 복지법 때문이라며 푸념한다. 나와 벤은 엉뚱한 스키에 웃고만다. 션의 팀이 5:2로 승리하면서 3 피리어드의 하키 경기가 약 한 시간만에 끝났다. 우리는 열 두시 반이 되어서야 엘렌길에 도착했다.
나는 벤과 와인을 한 잔 하러 엘렌길 끝자락의 ‘하드웨어’를 찾았다. 나는 값싼 레드와인을 마시고, 벤은 비싼 생맥주를 마시며 알렌 긴스버그, 윌리엄 S. 버로, 잭 케로엑, 밥 딜런, 헨리 밀러, 아나이스 닌에 대해 이야기 한다. 밤이 깊고 와인은 맛이 없지만 기분만은 괜찮다.

우리는 ‘하드웨어’에서 나와 ‘브릭’ 바로 자리를 옮긴다. 컨츄리 음악이 이어진다. 우리는 서둘러 잔을 비우고 ‘핑크’로 향한다. 프렌즈 퍼디난드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우리는 담배를 태우러 밖으로 나간다. 날이 무척 쌀쌀하다. 예순쯤 되었을 법한 백인 남성이 반쯤 탄 담배를 손에 쥐고 섰다. 벤만큼 큰 키에 풍채가 좋은 이 남성은 잿빛의 털모자를 머리 위에 슬쩍 얹은 듯 쓰고, 여러 겹의 카키색 코트를 걸쳐 입었다. 그는 눈 밑으로 볼록하게 부푼 주머니를 갖고 있고, 회색 빛의 바짝 마른 수염을 가슴 위까지 길게 길러 가져왔다. 그는 날씨가 좋다며 말을 붙인다. 나는 배 속을 뒤집는 추위에 몸서리를 치며 그를 정신 나간 사람이라 생각한다. 그는 갑자기 입을 것 없이 사는 인도인들의 이야기를 꺼낸다. 나는 지난 9월 살을 뒤집는 더위에 반쯤 정신을 잃었던 한 달간의 인도 여정을 떠올린다. 갑자기 목이 마르다. 담배 연기의 온기가 혀를 바짝 말린다. 이 사내는 인도, 이스라엘, 일본, 미국, 독일, 중국, 한국에 대한 두서없는 이야기를 쉴 새 없이 주저린다. 술에 물기를 빼앗긴 나는, 추위에 열기를 빼앗긴 나는 제 몸도, 제 정신도 아닌 상태에서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순간 ‘이 사내가 하는 이야기가 세상의 진실, 삶의 진리를 닮고 있는 것이면 어쩌나’하고 나는 걱정한다. 나는 그의 이야기에 집중하려, 그의 말들을 기억하려 머리 속을 정리한다. 집중! 집중! 너무 춥다. 사내가 맥주를 사겠다며 안으로 들어가자 청한다. 뒤를 돌아본 나는 벤이 어느새 사라져버린 것을 알게 된다.
나는 바 안으로 들어와 벤을 찾는다. 그는 금새 맥주 한 병을 더 비웠다. 도대체 내가 얼마나 오래 밖에 서서 그 사내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건지.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찾는다. 없다. 한 마디. 내가 뚜렷히 기억하는 그의 한 마디…
“Never fail to face the challenges of your life. Never!”